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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업은
어떤 어젠다 IP를
가지고 있습니까?
기업은 제품과 서비스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변화의 신호를 먼저 읽고, 그 변화에 이름을 붙이며, 자신의 경험과 경쟁력을 연결해 반복적으로 보여줄 때 하나의 의제를 대표하는 존재가 된다. 기업과 리더의 관점과 언어, 장면과 이야기가 자산이 되는 시대, 자신만의 ‘어젠다 IP’를 어떻게 만들고 소유할 것인지 생각해볼 때다.
글 유민영 플랫폼9와3/4 대표이사
IT 회사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자사 대표에게 어느 그룹사의 전체 사장단 회의에서 AX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회사의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강연은 해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어떤 연유로 연결됐는지 물었다. 작은 인터넷 경제 매체에 올해 진행한 사내 AI 전환 사례가 실렸는데 그 그룹사 HR팀이 그 기사를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업은 수많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밖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니라 장면과 이야기로 기억된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모든 기업이 AX 모드에 진입해 있다. 새로운 사례와 강렬한 장면은 누구나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하는 IP(Intellectual Property)가 될 수 있다. 적응과 전환이라는 필수 명제 앞에 선 기업의 가치는 그 지점에서 폭발한다.
어젠다 IP는 어떻게 기업 자산이 되는가
‘K’가 유행이다. 일제 강점기에 시작한 기업도 있지만 한국 기업의 상당수는 해방 후 탄생해 성장했다. 그래서 근래 80주년 행사가 많다. 한편 지난 30년은 새로운 창업의 시간이라 부를 만큼 모험과 도전이 이어졌다. 전통 기업들이 헤리티지를 연장하는 동시에 업계 1위의 시가총액을 훌쩍 넘어서는 젊은 회사들도 앞다투어 등장했다. 최근 한 기업이 차세대 포지셔닝을 어떻게 할지 고민을 털어놨다. 기업 단위에서 보면 그려지지 않았던 그림이 산업 단위로 보자 선명해졌다. 그래서 크게 보라고 했다. 산업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해온 역사적 서사에서 그 분야 ‘K의 상징’이라는 위치를 발견했다. 젊은 기업을 포용하는 ‘K 산업 파운더’라는 자리였다. 전통의 강자는 새로운 흐름을 흡수해 자신의 포지션을 강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는 유행과 시총 숫자만으로 얻을 수 없는 자산이다. 과거는 그렇게 미래가 된다.
이처럼 기업이 가진 역사와 경쟁력을 새로운 시대의 관점과 상징 언어로 재해석해 하나의 의제를 대표할 때 기업 가치를 새롭게 확장할 수 있다. 이것이 어젠다 오너십이 필요한 이유이며, 이로써 축적된 관점과 언어, 장면과 서사는 기업만의 어젠다 IP가 된다. 어젠다 오너십이 ‘누가 그 의제를 대표하는가’의 문제라면 어젠다 IP는 그 대표성이 반복된 언어와 행동을 통해 축적된 리더와 기업의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어젠다는 장면과 이야기로 선점한다
AI를 자사 기술과 페어링하려는 새로운 전장에서도 피 튀기는 어젠다 선점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와 로봇 아틀라스 시연을 통해 미래 휴머노이드 시장에 안착했고 관련 주가 상승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금 늦은 듯했지만 LG의 피지컬 AI에 대한 전략적 포커싱 커뮤니케이션은 흥미로웠다. 구광모 회장이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 본사에서 젠슨 황 CEO를 만나는 정면돌파 이벤트를 기점으로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냈다. 지난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함께 젠슨 황 CEO와 삼겹살 회동을 한 데 이어 별도 현지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후 딸 매디슨 황의 방문까지 이어지며 양사를 오가는 ‘셔틀 비즈니스’의 서사를 만들었다. ‘회장의 등장’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PI(President Identity)의 첫 성과는 ‘첫 행동’이다. 이 과정에서 LG는 전자와 에너지, 화학 등으로 나열되던 정체성을 휴머노이드·피지컬 AI라는 하나의 의제로 모으고 전략적 우선순위를 정했다. 피지컬 AI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함께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시장에 전달했다. 그렇게 경쟁력과 서사는 하나로 만났다.
의제 설정도 경영이다
급격한 변화의 신호를 먼저 포착하고 새로운 현상에 이름을 붙이며 이를 조직의 경험과 논리로 변환시키고 중요한 결정과 행동으로 연결하는 리더십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회사와 CEO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평판과 상징은 어떻게 만들 수 있나요?” 최근 기업에서 많이 묻는 질문이다.
저널리즘학과에 들어가 처음 배우는 커뮤니케이션학 개론에 의제설정 이론(Agenda setting theory)이 있었다. 대중매체가 특정 이슈를 반복·강조하면 수용자도 그 이슈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매체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지’보다 ‘무엇에 대해 생각할지’의 우선순위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AI 시대에는 새로운 영역과 먹거리를 개척하고 인재를 확보해야 하는 기업가에게도 이제 그 의제를 제시하는 역할이 생겼다.
우리 기업사는 기업하는 일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철저히 분리해 왔다. 정부와 거리를 두고 규제를 피하면서 조용히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의제 설정을 의식적으로 피해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AI의 시간에는 기업가의 역할이 확장된다. 변화를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기업이 새로운 질서와 의제를 먼저 제시하지 못하면 제도와 문화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다 할 수 없지만 사회에 신호를 보낼 수는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제시한 AI 인재 교육 의제는 그래서 적절하고 신선하다. 기업도 나라도 개인도 AI 시대를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생존의 문제다.
“기업의 브랜딩과 기업가의 캐릭터도 아이디어로 연결된 독보적 세계이자 하나의 IP다.
그리고 자기 정의의 가치는 누가 소유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기 정의를 소유하라
기업과 CEO를 설명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어젠다 IP는 리더십과 비즈니스에서 브랜드, 평판, 이해관계자 팬덤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다. 니콜라이 탕겐 노르웨이은행투자관리운용(NBIM) CEO는 “우리는 석유를 두 번 발견했다. 한 번은 땅속에서, 또 한 번은 금융시장에서”라고 노르웨이 국부펀드를 설명했다.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부의 파이프라인’으로 정의하며 그 모델의 어젠다 오너십을 가졌다.
기업 커뮤니케이션도 스스로 IP가 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계 최대 유튜버 미스터비스트는 가장 잘 제작된 영상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고의 유튜브 동영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자신이 어떤 비즈니스를 하는지 정확히 정의한 것이다. 기업의 브랜딩과 기업가의 캐릭터도 아이디어로 연결된 독보적 세계이자 하나의 IP다. 그리고 자기 정의의 가치는 누가 소유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돌리 파튼과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이 만든 가치의 소유권과 주도권을 놓지 않고 이를 IP와 사업으로 확장해 시장을 개척한 아티스트이자 기업가다. 2026년 8월 별세한 파튼은 20세였던 1966년 삼촌이자 공동 작곡가 빌 오웬스와 회사를 세워 노래의 권리를 직접 보유하기 시작했다. 파튼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를 엘비스 프레슬리가 녹음하려 했을 때도 일부 저작권을 요구하자 거절했다. 슈퍼스타가 노래를 불러 유명해질 기회보다 노래의 소유를 택한 것이다. 이후 음악 수익을 사업으로 확장해 IP-현금흐름-지분-사업-브랜드 가치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이를 더욱 확장했다. 데뷔 초기 마스터 권리를 둘러싼 분쟁 이후 과거 앨범을 ‘Taylor's Version’으로 재녹음하고 팬덤과 내러티브를 움직여 플랫폼과 음반사가 쥐고 있던 경제적 권력을 되찾아왔다. 파튼이 계약 단계부터 IP 주도권을 지켰다면 스위프트는 이미 넘어간 권리에 맞서 앨범을 다시 제작해 새로운 권리를 만들고, 이후 원본 마스터 권리까지 되찾은 것이다. IP 주도권은 가치 소유권을 지키고 그 가치의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제품과 서비스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명징하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기업 역시 여론과 평판에 의해 선출되는 셈이다. AI 시대의 기업과 CEO는 좋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화하면 이렇다.
변화를 먼저 읽는다 → 그 변화에 이름을 붙인다 → 자신의 경험과 경쟁력에 접점을 만들어 연결한다 → 자신과 조직의 역할을 스스로 정의한다 → 행동으로 증명한다 → 반복해서 말하고 축적한다 → 마침내 어젠다 오너십을 확보하고 자신의 IP를 만든다. 결국 기업과 리더에게 남는 것은 자신을 설명해온 장면과 이야기다.
한창 상영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음유시인의 대사가 반복된다. “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 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 한 생각을, 한 지략을, 한 남자를.”, “훗날 이 문명은, 전부 노래로만 기억될 거야.”
유민영
유민영은 청와대 춘추관장과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냈으며, 일본 와세다대 미일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기업과 최고의사결정자들을 위한 캠페인 전략, 위기 관리, CEO 브랜딩을 전문으로 하는 전략 컨설팅 기업 플랫폼9와3/4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