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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전력 항로를 개척하다
HD현대중공업 힘센엔진(HiMSEN)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산업의 성장으로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늘면서 안정적인 전력 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25년 전 배의 심장인 엔진을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도전에서 출발한 HD현대중공업의 힘센엔진이 이제 바다를 넘어 AI 시대의 전력 인프라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글 김나연
사진 제공 HD현대중공업
조선 강국에 남아 있던 과제, 엔진 기술 자립
선박에서 엔진은 추진과 전력 공급을 담당하는 핵심 설비다. 세계적인 조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선박 자체를 건조하는 기술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 기자재와 엔진의 설계·제조 기술까지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산업이 성장하던 시기 엔진 분야에서는 해외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HD현대중공업 역시 해외 기업과 기술제휴를 맺고 1979년 엔진 생산을 시작했다. 해외 엔진 제작사의 설계와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선박을 직접 설계하고 건조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선박의 핵심 설비인 엔진에서는 아직 해외 기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엔진에 대한 기술 의존은 사업 전반에 여러 제약을 낳았다. 엔진을 생산할 때 해외 업체에 기술료를 지급해야 했고, 성능 개선이나 원가 절감을 위해 설계를 바꾸려 해도 자체적으로 자유롭게 변경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고객이 원하는 사양에 맞춰 엔진을 바꾸는 데에도 한계가 따랐다. 외부에서 완성된 기술을 들여와 생산하는 것과 엔진의 설계 원리를 직접 확보해 스스로 제품을 발전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조선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고 수주 선종과 고객의 요구도 다양해질수록 독자적인 엔진 설계 기술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HD현대중공업이 선택한 것은 해외 기술을 계속 따라가는 대신 직접 엔진을 개발하는 길이었다. 1991년 독자적인 중형엔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고, 약 10년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2000년 8월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중형엔진 ‘현대-힘센(HYUNDAI-HiMSEN)’을 완성했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첫 힘센엔진을 생산하며 독자 엔진 시대의 첫발을 내디뎠다.
“외부에서 완성된 기술을 들여와 생산하는 것과 엔진의 설계 원리를 직접 확보해 스스로 제품을 발전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사람을 생각한 설계, 힘센만의 경쟁력
‘힘센(HiMSEN)’이라는 이름에는 엔진의 정체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Hi-touch Marine & Stationary Engine’의 앞글자를 조합한 이름으로, 선박과 육상에서 활용되는 엔진이라는 의미를 담는 동시에 강한 힘을 연상시키는 우리말 ‘힘센’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해외 기술을 바탕으로 생산하던 엔진에서 벗어나 자체 기술로 완성한 제품에 독자적인 이름까지 붙이면서 하나의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독자 엔진 개발 과정에서 HD현대중공업이 차별화 요소로 삼은 것은 다루기 쉬운 설계였다. 생산자와 사용자 모두의 편의를 고려한 ‘Hi-touch’ 개념을 설계에 적용했다. 엔진 외부를 감싸던 파이프를 없애고 주요 소모성 부품을 바깥쪽에 배치해 수리·교체·청소가 쉽도록 했으며, 실린더 헤드를 단위화하고 연료분사 계통과 공급 시스템을 단순화·모듈화했다. 크랭크실1 개구부 역시 작업 편의를 고려해 최대한 넓게 설계했다. 단순하고 합리적인 구조를 통해 제작과 조립은 물론 애프터서비스의 편의성까지 높인 것이다.
환경성과 출력도 함께 고려했다. 배출가스를 국제해사기구(IMO) 허용 기준치보다 낮추는 한편, 실린더당 200kW의 출력을 확보해 선박의 추진용과 발전용 엔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독자 기술 확보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생산과 운용 현장의 목소리까지 제품 설계에 담았다는 점이 힘센엔진의 특징이었다.
독자 기술은 하나의 제품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라인업으로 이어졌다. 힘센엔진은 500kW에서 최대 2만 2,400kW까지 다양한 출력의 모델을 갖추고, 경유와 중유를 사용하는 디젤엔진부터 LNG, 메탄올, 암모니아를 사용하는 가스 및 다중연료 엔진까지 다양한 제품군을 구성했다. 이러한 제품 경쟁력을 바탕으로 중형엔진 시장점유율 세계 1위에 올랐으며, 선박용 중형엔진 부문에서도 25%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생산 규모도 빠르게 늘었다. 2001년 4대 생산으로 시작한 힘센엔진은 2011년 누적 생산 5,000대를 넘어선 데 이어 2016년에는 1만 대를 돌파했다. 독자 기술 확보를 목표로 출발한 하나의 엔진이 다양한 제품군과 시장점유율, 생산 실적을 쌓으며 HD현대중공업을 대표하는 글로벌 엔진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 1.크랭크실(Crankcase): 엔진 내부에서 크랭크축이 회전하는 공간으로, 점검·정비를 위해 작업자가 접근하는 부위
HD현대중공업 육상 발전용 힘센(HiMSEN) 가스엔진
힘센엔진, 예상치 못한 항로를 열다
힘센엔진의 주된 사용처는 선박용과 육상발전용이다. 선박에서는 중소형 선박의 추진장치 또는 대형 선박의 발전용 엔진으로 사용된다. 첫 제품 생산 이후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하는 선박의 발전기 엔진에도 힘센엔진의 적용이 확대되며 자체 개발 엔진의 입지를 넓혀갔다.
힘센엔진은 일찍부터 육상 발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HD현대중공업은 힘센엔진을 육상용 발전설비로 패키지화해 이동식발전설비(Packaged Power Station)와 디젤발전설비(Diesel Power Plant)에 탑재하고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했다. 이동식발전설비 도입으로 만성적 에너지 부족을 해결한 쿠바 정부는 2007년 발행한 10페소 지폐 뒷면에 PPS를 그려넣기도 했다.
최근 육상 발전 분야에서는 새로운 수요가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서비스가 확산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AI 연산에는 막대한 규모의 서버와 컴퓨팅 설비가 필요하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전력이 뒤따라야 한다. 수많은 서버가 24시간 가동되는 데이터센터에는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발전 인프라가 중요하다.
힘센엔진의 활용 영역은 시대와 함께 새로운 시장으로 넓어지고 있다. 선박용 엔진에서 육상 발전설비로 활용 영역을 넓혀온 힘센엔진이 이제 대규모 전력 수요를 가진 데이터센터의 발전설비로 연결되고 있다. 처음 힘센엔진이 개발되던 2000년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AI 데이터센터 시장을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당시 확보한 독자 엔진 기술이 20여 년이 지난 뒤 새로운 산업의 전력 수요와 만나고 있다.
HD현대중공업 육상발전용 힘센(HiMSEN) 가스엔진 H54GV 모델
AI가 키운 전력 수요, 미국 데이터센터로
이처럼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커진 전력 수요는 실제 대규모 계약으로 이어졌다. HD현대중공업은 2026년 4월 미국 에너지 인프라 개발기업 아페리온에너지그룹(AEG)과 20MW급 힘센엔진을 기반으로 한 총 684MW 규모의 발전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힘센엔진을 기반으로 한 발전설비가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불과 넉 달 만에 그 규모는 더욱 커졌다. 2026년 8월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코반에너지그룹과 9.6MW급 힘센엔진을 기반으로 총 1,000MW 규모의 발전설비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공급되는 발전설비는 미국 현지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짧은 기간 동안 미국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대규모 계약이 연이어 성사됐다는 점은 힘센엔진의 활동 무대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두 계약에는 각각 20MW급과 9.6MW급 힘센엔진이 적용됐다. 서로 다른 출력의 엔진을 기반으로 대규모 발전설비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데이터센터의 규모와 전력 수요에 맞춰 다양한 발전설비로 확장될 수 있는 힘센엔진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힘센엔진이 개발된 시점과 오늘날 시장이 요구하는 역할의 변화다. 1990년대 독자 엔진 개발의 출발점이 해외 기술 의존을 벗어나기 위한 ‘기술 자립’이었다면, 이제 힘센엔진은 AI 산업의 급성장이 만들어낸 새로운 전력 수요와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HD현대중공업은 8,336억 원을 투자해 울산 울주군 온산읍에 3GW 규모의 힘센엔진 신규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영암 엔진공장 설비 보완을 통해 연간 총 4GW 규모의 육상 발전용 엔진 생산능력을 확보해 2028년부터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빠르게 늘어나는 발전엔진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육상 발전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기 위한 투자다. 선박과 육상발전을 거쳐 AI 데이터센터까지, 힘센엔진은 새로운 수요에 맞춰 생산 기반까지 확대하며 글로벌 엔진 브랜드로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