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새로운 엔진, 뉴 K-인더스트리

미래산업을 고르는 대신
성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자
뉴 K-인더스트리와 산업정책 3.0

글 정철 한경협 CRO 겸 한국경제연구원장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한국경제인협회 연구총괄대표(CRO)

•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 공동회장

• 한국국제통상학회 회장

앞으로 대한민국은 무엇으로 성장할 것인가

앞으로 30년, 대한민국은 무엇으로 성장할 것인가. 최근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과 산업경기가 회복되면서 한국 경제에도 다시 성장의 기회가 보이고 있다. 2025년 1.1%에 머물렀던 실질 GDP 성장률은 반도체 경기 호조에 힘입어 올해 3.3%로 반등할 전망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경기 반등이 우리 경제의 다음 30년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잠재성장률 하락이라는 구조적 제약은 여전하고, 반도체를 제외한 제조업의 활력과 서비스 수출 경쟁력도 충분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올해의 성장률을 넘어, 한국 경제가 앞으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이럴 때 흔히 ‘제2의 반도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미래를 책임질 킬러 기술과 전략산업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다음 성장동력이 완전히 새로운 산업 하나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오랜 기간 축적된 공정기술과 숙련, 공급망과 시행착오의 결과다. 이러한 축적된 역량에 AI와 청정에너지, 새로운 서비스를 결합하고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스케일업한다면, 기존 산업에서도 제2, 제3의 반도체가 탄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망산업 몇 개를 골라 지원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산업 전체의 가치 창출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이것이 뉴 K-인더스트리의 출발점이다.

“중요한 것은 유망산업 몇개를 골라 지원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기업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산업 전체의 가치 창출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이것이 뉴 K-인더스트리의 출발점이다.”

경쟁의 단위가 바뀌면 산업정책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세계 산업의 경쟁 무대는 이미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맥킨지는 18대 미래 유망산업의 매출 규모가 2022년 약 7.2조 달러에서 2040년 29조~48조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조업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다. 기존 제조업의 경쟁력 위에 AI와 청정에너지, 서비스가 결합하면서 산업의 가치 창출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AI와 연결되고, 자동차는 소프트웨어와 모빌리티 서비스로 확장되며, 에너지는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시설을 잇는 산업 경쟁력의 핵심 조건이 되고 있다. 이제 경쟁은 ‘제품 대 제품’을 넘어 기술·에너지·서비스·인프라가 연결된 ‘생태계 대 생태계’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 산업정책의 변화는 크게 세 단계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산업정책 1.0이 제조업 육성과 수출산업화를 통해 산업화의 토대를 놓고, 산업정책 2.0이 ICT 산업과 디지털 인프라를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확장했다면, AI 시대의 산업정책 3.0은 기존 산업 전체의 ‘전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정 산업을 정부가 선택해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만으로는 기술·에너지·서비스·인프라가 결합된 생태계 경쟁에 대응하기 어렵다. 산업정책 3.0의 핵심은 정부가 산업의 승자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창의와 투자가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세 가지 전환, 산업의 생산·시장·가치 창출 방식을 바꾸다

뉴 K-인더스트리는 AX·GX·SX의 세 가지 전환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IX의 ‘3+1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AX(AI Transformation), AI 전환은 산업의 생산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이제는 AI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 못지않게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잘 쓰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제조·금융·유통·물류 등 산업 전반을 지능화해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한국 제조업이 축적한 공정 데이터와 엔지니어의 암묵지, 정밀제조 역량에 피지컬 AI를 결합한다면 디지털 공간의 AI 경쟁을 실제 생산현장의 경쟁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피지컬 AI의 승부는 범용모델의 성능만이 아니라, 로봇과 장비가 현장에서 얼마나 정확하고 안전하게 작동하며 생산성을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폭넓은 제조 기반을 가진 한국은 분명한 기회를 갖고 있다.
GX(Green Transformation)는 탄소 감축을 넘어 에너지 공급과 산업 경쟁력, 새로운 시장을 함께 설계하는 전환이어야 한다.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전력 없이는 AI 데이터센터도, 반도체와 첨단 제조시설도 성장하기 어렵다. 동시에 청정수소, 지속가능항공유, 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 기술), 차세대 원전, 재생에너지와 순환경제는 새로운 수출산업이 될 수 있다.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 신산업 경쟁력을 함께 추구하는 ‘산업·에너지 전환’이 한국형 GX의 핵심이다.
SX(Service Transformation), 서비스 전환은 가치 창출과 수출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자동차는 단순 판매를 넘어 OTA(Over-The-Air, 무선 업데이트 기술)·자율주행·금융보험·구독서비스로, 가전은 제품을 넘어 앱·스마트홈·서비스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K-콘텐츠 역시 제작과 흥행에 머무르지 않고 플랫폼, 공연, 관광, 푸드, 뷰티 등으로 연결될 때 더 큰 산업적 파급력을 만든다. 제조와 서비스의 경계를 허물고 K-컬처의 힘을 소비재와 서비스 수출까지 확장하는 ‘K-Everything’은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성장 모델이다.

IX가 뉴 K-인더스트리의 성패를 가른다

AX·GX·SX가 산업 전환의 방향이라면 IX(Infrastructure Transformation), 인프라 전환은 그 방향을 실제 투자와 사업으로 연결하는 기반이다. 여기서 인프라는 도로·항만·통신망 같은 물리적 시설만을 뜻하지 않는다. 제도, 인재, 금융·시장, SOC(Social Overhead Capital, 사회간접자본) 등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조건을 포괄한다. 산업 전환의 속도는 가장 앞선 기술이 아니라 가장 늦게 움직이는 기반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IX는 뉴 K-인더스트리의 부수적 지원책이 아니라 AX·GX·SX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축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기반은 인재다. AX에는 AI 기술만 아는 인력이 아니라 제조공정과 산업 현장을 함께 이해하는 융합인재가 필요하고, GX에는 전력·원전·수소·탄소기술을 연결할 수 있는 공학인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학령인구 감소와 이공계 인재 부족은 이미 산업 전환의 제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재 양성의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육과 연구, 기업의 실제 프로젝트를 연결하고, 국내외 우수 인재가 한국에서 도전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과 이민·정주 환경까지 함께 바꿔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를 생각해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기술과 투자 의지가 있어도 부처별 인허가를 순차적으로 밟는 동안 투자 시기를 놓칠 수 있고, 입지를 먼저 정한 뒤 전력과 용수를 확보하려 하면 사업이 지연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인력만 양성해서는 데이터센터 운영과 산업별 AI 활용에 필요한 융합인재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 이처럼 어느 하나만 막혀도 전체 혁신이 늦춰질 수 있다. 제도는 새로운 시도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인재와 금융, 시장과 SOC도 기업의 투자와 혁신이 실제로 일어나는 흐름 안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 속도에 맞춰 이러한 기반을 전환하는 것이 IX의 본질이다.
산업 전환은 기술과 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데이터센터나 에너지 시설이 국가적으로 필요하더라도, 전력과 용수 부담을 떠안는 지역사회의 동의 없이 사업을 지속하기 어렵다. AI 도입으로 일자리와 숙련의 가치가 달라질 때 그 부담을 받는 근로자에 대한 재교육과 전환 지원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산업 전환의 편익은 넓게 공유하고 비용을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시키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사회적 수용성은 혁신을 늦추는 장애물이 아니라, 혁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인프라다.
특히 제도 혁신은 새로운 기술과 사업이 시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출발점이다. 기술과 소비자 수요의 변화를 기존의 포지티브 규제가 따라가지 못하면 법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혁신 기술의 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 신산업 분야에서는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예외적으로 제한하는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을 확대하는 한편, 기업이 성장할수록 새로운 규제와 의무가 뒤따르는 이른바 ‘계단식 규제’도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 속도를 제도가 따라갈 수 있도록 규제의 틀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미래산업을 고르는 대신,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

글로벌 산업정책의 경쟁은 보조금의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주요국이 산업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차별화된 길은 우리가 이미 가진 강점을 얼마나 빠르고 정교하게 연결하고 전환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이미 세계적 수준의 제조 역량과 디지털 인프라, 그리고 K-컬처가 만들어낸 글로벌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자산들을 따로 두지 않고 AI·에너지·서비스와 연결해 새로운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부는 기업을 대신해 미래산업의 승자를 고르기보다 제도·인재·금융·전력·용수·입지 등 산업 전환의 병목을 해소해야 한다. 기업은 지원을 기다리기보다 기존 사업에 AI와 에너지, 서비스를 결합해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들고, 공급망과 지역 생태계로 혁신을 확산해야 한다.
뉴 K-인더스트리 포럼의 역할도 또 하나의 산업정책 보고서를 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AX·GX·SX별로 기업이 실행할 투자·혁신 과제와 정부가 해소해야 할 IX 과제를 짝지어 제시하고, 단기 과제와 10년 이상의 장기 과제를 구분한 산업전환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포럼의 제안이 실제 기업의 투자와 정부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점검할 때 뉴 K-인더스트리는 구호가 아니라 성장전략이 될 수 있다.
앞으로 30년 뒤 어떤 기술과 산업이 세계를 이끌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주력산업과 성공방식만으로 미래의 성장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세대의 책무는 미래의 승자를 대신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고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물려주는 데 있다.
미래산업을 고르는 대신 새로운 산업과 기업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축적된 제조 역량을 AI·에너지·서비스와 결합해 제2, 제3의 성장동력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제조강국 대한민국을 AI가 내재화된 혁신강국으로 바꾸는 뉴 K-인더스트리, 산업정책 3.0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