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안보의 재부상: 공급망 전력, 산업 전략의 새 과제
글로벌 전력 시장의 해답은
현장과 속도에 있다
권기영 효성중공업 전무
단순한 공공 유틸리티였던 전력망은 이제 국가의 산업 생존권을 쥔 핵심 안보 자산이자 기업의 전략 자산으로 격상되었다. 분기 실적 연속 최대치를 경신하며 글로벌 초고압 전력기기 시장의 슈퍼 사이클을 주도하고 있는 효성중공업의 권기영 전무를 만나, 글로벌 에너지 대전환기의 구조적 흐름과 우리 기업들이 직면한 딜레마, 그리고 이를 돌파할 미래 에너지 전략에 대해 들어봤다.
정리 김나연
사진 신규철
Q. 지난 5월 시카고에서 열린 ‘IEEE PES T&D 2026’ 현장에서 전무님께서 직접 체감하신 전력 시장의 가장 큰 구조적 변화는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전력이 산업을 뒤에서 지원하는 기반 시설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전력망 구축 속도가 기업과 국가의 산업 투자 속도를 결정짓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번 시카고 현장이 그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과거 전력회사들만의 논의 장이던 전시회에 이번에는 AI 데이터센터를 주도하는 빅테크와 대규모 제조업체, 정부 정책 입안자까지 모두 뛰어들어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력이 부족해 투자가 지연된다’는 말이 이미 현실입니다.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형 도시 수준의 전력을 요구하면서, 송전망, 변압기, 차단기 같은 초고압 인프라가 단순한 설비를 넘어 산업 성장의 최대 병목(Bottleneck)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위기가 유가에 좌우되는 ‘연료 확보’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산업 구조 자체가 전기 중심으로 재편되는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결국 전력망을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구축하느냐, 그 ‘속도와 실행력’이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Q. 초고압 변압기나 차단기 같은 전력기기는 설비 특성상 단기간에 공급 역량을 확충하기 까다로운 산업군입니다. 효성중공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지금의 입지를 다지기까지, 시장의 구조적 흐름을 어떻게 읽어 내고 핵심 역량을 축적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전력기기는 오늘 투자해 내일 완제품을 찍어내는 산업이 아닙니다. 초고압 변압기나 차단기는 수십 년간 축적된 생산 데이터와 현장 검증을 통한 ‘품질 신뢰성’이 진입의 절대적 전제조건이고, 보수적인 글로벌 유틸리티 공급망에서 신뢰를 얻기까지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저희가 선제적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핵심은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전 세계 전력망 투자는 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방향’이라 확신한 데 있습니다. 일찍부터 미국 초고압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HVDC(초고압직류송전), 초고압 차단기 같은 핵심 기술에 공백 없이 투자해 온 이유입니다.
구조적 흐름을 읽는다는 것은 수요 예측을 넘어 ‘고객이 미래 현장에서 마주할 문제’를 한발 앞서 정의하는 일입니다. 미국, 유럽 등 각 권역별로 다른 계통 환경과 요구사항을 분석해 기술력을 미리 축적해 둔 덕분에, 지금의 대전환기에 ‘속도와 실행력’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위기가 유가에 좌우되는 ‘연료 확보’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산업 구조 자체가 전기 중심으로 재편되는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결국 전력망을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구축하느냐, 그 ‘속도와 실행력’이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Q. 그동안 미국 765kV 초고압 전력기기 시장을 포함한 글로벌 무대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져오셨습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가장 집중했던 전략적 핵심과 글로벌 리더십을 지속하기 위해 안고 가야 할 핵심 과제는 무엇입니까?
글로벌 초고압 시장에서 단순한 가격 경쟁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지금 고객들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 ‘약속한 납기에 실제로 공급할 수 있는가’입니다. 전력망 프로젝트는 단 한 달의 공기 지연만으로도 막대한 연쇄 손실 지연 비용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효성중공업의 핵심 경쟁력도 바로 이 ‘공급 안정성’과 ‘납기 대응력’입니다. 전 세계적인 공급 병목 속에서 요구 타임라인에 맞춰 적기에 인도하고 품질을 보증하는 것 자체가 지금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진입 장벽입니다.
전력 인프라는 한 번 구축하면 30년에서 40년 이상을 운영해야 하는 장기 안보 자산입니다. 그래서 고객은 단품을 파는 제조사가 아니라 전 수명 주기를 책임질 ‘전략적 파트너’를 원합니다. 효성중공업이 기자재 제조업체를 넘어, 글로벌 전력 솔루션 파트너로 역량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Q. 최근 대용량 송전이 가능한 HVDC와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이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 인프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효성중공업이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을 통해 HVDC를 개발한 성과가 지니는 본질적인 의미와, 향후 구상 중인 포트폴리오의 비전이 궁금합니다.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 전환은 발전 위치와 전력 수요지가 완전히 분리되는 ‘지리적 불일치’를 동반합니다. 이 공백을 메우고 대용량의 전력을 손실 없이 장거리로 수송하는 핵심 인프라가 바로 HVDC(초고압직류송전)입니다.
이제 HVDC는 단순한 송전 기술의 영역을 넘어섰습니다. 특히 한국이나 동북아처럼 전력 수요 밀도가 극도로 높은 지역에서는, 전력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잇는 ‘에너지 고속도로’의 구축 여부가 국가 전력망 전략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 됩니다.
효성중공업이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 기반의 HVDC를 개발한 것은 단순한 수입 대체나 제품 개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전력 인프라의 핵심 원천 기술을 쥐고 있다는 것은, 글로벌 공급망 교란 속에서도 ‘국가 전력망의 기술적 주권과 산업 경쟁력’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원천 기술이 없으면 계통 운영의 유연성도, 미래 시장의 주도권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저희의 비전은 명확합니다. 이번에 확보한 독자적인 HVDC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이 요구하는 장거리 대용량 송전 인프라 포트폴리오를 더욱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입니다.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먼저 읽고 준비해 온 만큼, 신속하고 확실한 실행력으로 글로벌 에너지 고속도로 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입니다.
Q. 국내외 유수의 대기업들을 고객사로 마주하시면서 각 기업의 에너지 대응 전략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시는 순간은 언제이며, 상대적으로 준비가 더딘 국내 기업들이 시급히 보완하고 대비해야 할 지점은 어디입니까?
그 차이가 가장 선명한 순간은 바로 ‘새로운 투자를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글로벌 빅테크나 데이터센터 기업들은 이제 에너지를 단순한 운영 비용(Expense)이 아니라,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전략 자산(Strategic Asset)’으로 다룹니다. ‘어느 지역에 얼마나 안정적이고 깨끗한 전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를 보고 투자 입지를 결정합니다. 전력망 확보가 불확실하면 시장성이 좋아도 비즈니스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반면, 아직 많은 국내 기업들은 에너지를 제품 생산을 위해 사후에 조달하고 정산하는 ‘운영 비용’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남아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가장 시급하게 대비해야 할 것은 에너지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입니다. 앞으로는 ‘얼마나 싸게 전기를 쓰느냐’라는 단가 경쟁보다, ‘원하는 시점에 신뢰할 수 있는 전력 품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글로벌 규제에 맞는 실질적인 탄소 감축 및 관리 역량을 갖췄는가’가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전력 인프라 대비가 늦으면 아무리 뛰어난 첨단 기술이 있어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Q. 많은 기업이 RE100과 탄소중립을 선언하지만 실제 이행 단계에서는 큰 장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전력 인프라 관점에서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현실성 있는 탄소중립 이행 경로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계적 순서로 접근해야 합니까?
RE100과 탄소중립이 선언에만 그치는 이유는, 이를 당위성이나 대외 과시용 자산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앞서나가는 선도 기업들은 탄소중립을 결코 ‘ESG 보고서 서류 채우기용 프로젝트’나 규제 대응 차원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전력 인프라 관점에서 기업이 현실적인 이행 경로를 설계하려면 철저하게 세 가지 단계의 순서로 판을 짜야 합니다.
첫째는 ‘시각의 전환’입니다. 탄소중립을 비용이 아닌 핵심 ‘경쟁력’의 문제로 재정의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둘째는 ‘전략의 동기화’입니다. 에너지를 조달하는 전력 전략, 제품을 만드는 생산 전략, 그리고 회사의 자금을 집행하는 투자 전략이 장기 사업 계획 안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생산 라인을 증설할 때 전력 인프라와 재생에너지 매칭 가능 여부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통합 인프라 아키텍처 구축’입니다. 외부에서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Renewable Energy Certificate)를 사 오는 임시방편을 넘어, 사업장의 전력 효율화, 피크 관리를 위한 ESS 도입, 나아가 불안정한 재생에너지를 견뎌낼 수 있는 자체 전력망의 안정성까지 장기적으로 연계해 설계해야 합니다.
결국 미래 시장에서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환경 보호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생존 조건입니다. 이 세 가지 순서에 복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얼마나 속도감 있게 준비하고 실행하느냐가 우리 기업들의 실질적인 생존력과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Q. 탈탄소화나 전력망 현대화 같은 에너지 전환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기술이나 자본의 한계를 넘어 예상치 못한 제도적·사회적 장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민간 기업의 실행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와 우리 사회가 정책적으로 풀어주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에너지 전환이 선언을 넘어 실질적인 인프라 구축 단계로 접어들면, 기술 개발이나 자금 조달보다 훨씬 거대하고 무거운 장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전력 산업은 단순 제조업이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가 맞물린 ‘거대한 생태계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초고압 기술과 자본이 준비되어 있어도 복잡한 인허가 절차, 장거리 송전망 구축에 따른 주민 수용성 문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전문 인력의 부재 앞에서는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속도의 격차입니다. AI 시대를 맞아 산업 생태계가 요구하는 전력 인프라의 양과 변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데, 실제 전력망 구축과 인허가 타임라인은 여전히 장기 프로젝트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괴리는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절대 좁힐 수 없습니다.
결국 정부와 사회의 핵심 역할은 ‘예측 가능하고 속도감 있는 제도적 지원’입니다.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전력망 전략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복잡한 인허가 규제를 현실화하며, 수용성 문제를 중재할 실행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앞으로는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 역량의 속도’가 곧 국가 경제와 안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효성중공업이 지향하고 그려 나갈 미래 에너지 생태계의 청사진이 궁금합니다. 아울러 이 거대한 전환기를 주도해 나갈 후배 경영인들과 현장의 젊은 엔지니어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미래의 전력 산업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뒤에서 전 세계 산업 생태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심장’이 될 것입니다. AI, 반도체, 초거대 데이터센터 등 인류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혁신도 결국 안정적인 전력망 인프라 없이는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력 산업은 평소에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국가 산업의 거대한 기반과 안보를 지탱하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거대한 전환기를 마주할 후배 경영인들과 젊은 엔지니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결국 모든 경쟁력의 답은 ‘현장’에 있다는 점입니다.
도면 위의 기술이나 제품 스펙에만 매몰되어서는 글로벌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링 기술력이라는 단단한 기본기 위에, 글로벌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읽는 눈, 그리고 고객이 마주한 계통 운영 리스크까지 함께 이해하는 ‘거시적인 시야’를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기술과 시장, 운영을 통섭적으로 바라보는 현장 중심의 엔지니어야말로 미래 에너지 시장의 판도를 바꿀 진정한 ‘실행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닦아온 글로벌 무대 위에서, 후배들이 더 과감하고 속도감 있게 미래 에너지 영토를 넓혀가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