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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안보의 재부상: 공급망 전력, 산업 전략의 새 과제

중동 리스크ㆍAI 전력 수요 급증과
기업의 에너지 대응 전략
전력 중심의 전략이 필요하다

호르무즈 사태로 불거진 에너지 공급망 위기와 AI 발전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이 맞물리며 전 세계 기업들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에너지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단순한 비용 관리 대상이었던 전력은 이제 기업의 생산과 투자,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바뀌고 있다.
안정적인 전력 확보 없이는 AI 시대에 경쟁의 출발선에도 서기 어려워질 수 있는 만큼,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장기 전력 조달과 발전원 다변화, PPA·SMR·ESS 연계 등 실질적인 전력 확보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배순한 딜로이트 인사이트 이사

전력 조달 구조의 취약성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 타격했다. 이란은 즉각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섰다. 전 세계 LNG 물동량의 약 20~25%가 통과하는 핵심 해상 통로가 흔들리자, 세계 최대 LNG 공급국인 카타르는 일부 LNG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이란의 보복은 동시에 두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스라엘 본토와 바레인·UAE·쿠웨이트에 주둔한 미군 기지가 모두 공격 대상이 됐다. 전쟁 발발 직후 LNG 시장 변동성도 급격히 확대됐다. 중동 에너지 시설 타격 직후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하루 동안 최대 35% 급등했으며, LNG 해운 운임 역시 급격히 상승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일대 해상 운송 차질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전반에 충격을 남겼다.
한국은 이번 중동 리스크의 영향을 더욱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내 원유 수입의 약 70%, LNG 수입의 약 1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며, 하루 원유 수입량만 약 177만 배럴에 달한다. 해협 봉쇄나 해상 운송 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발전소와 산업 현장은 연료 조달 불안과 원가 상승 압력에 동시에 직면하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발전 구조가 LNG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LNG 가격 상승은 발전 연료비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압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철강·석유화학처럼 전력 사용량이 큰 산업일수록 전기요금 상승과 전력 공급 불확실성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결과적으로 제조업 전반의 수익성과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올해 3월 산업연구원은 호르무즈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한국 제조업 평균 생산비가 11.8%, 전 산업 평균도 9.4% 상승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이번 사태를 ‘현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유 시장 공급 충격’ 중 하나로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AI 전력 수요

중동 리스크가 전력 공급을 막는 동안, 반대편에서는 AI 데이터센터가 전력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4년 약 415TWh에서 2030년 약 945TWh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불과 6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하는 규모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와 전력 구조 자체가 다르다. 기존 데이터센터가 통상 10~25MW 수준의 전력을 사용한다면, AI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는 100MW 이상의 전력을 요구한다. GPU 기반 AI 학습과 추론은 24시간 최대 부하 상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수요 탄력성도 거의 없다. 낮에 전기요금이 비싸다고 AI 학습을 멈출 수 없고, 태양광 발전량이 줄어든다고 데이터센터를 중단할 수도 없다.
재생에너지 100% 약속을 했던 구글도 2025년 보고서에서 ‘기후목표 달성이 이제 모든 수준에서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AI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미국 PJM 전력망에서는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가 이미 전력시장 가격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4년 MW-day1 당 약 29달러에서 2026년 약 329달러 수준까지 급등했으며, PJM2과 시장 분석기관들은 데이터센터 중심의 전력 수요 증가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력 수요의 증가 추세는 기존 전력망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급증이라 할 수 있다.

  • 1.MW-day 당 가격 (MW-day): 전력 용량 1MW를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의 가격
  • 2.PJM 전력망 (PJM Grid / PJM Interconnection): 미국 동부를 담당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전력 도매시장 겸 전력망 운영기관, AI 전력 수요 충격이 실제 가격으로 드러난 대표 전력시장

글로벌 선도기업의 전략 자산화와 4대 대응 전략

한국은 사실상 외부 전력망 연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전력망 고립국이기에 두 충격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처한 상황이 더욱 불리하다. 따라서 에너지 조달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입 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가동 가능한 발전원을 직접 확보하는 방향으로 조달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
전력을 단순히 구매하는 것에서 직접 확보하고 통제해야 하는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전력 자립 역량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첫째, 전력 조달 방식을 기존 전력망 구매 중심에서 장기 직접 조달 구조로 전환하여 향후 10~20년간 필요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은 발전 사업자와의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을 통해 재생에너지, ESS 등 대규모 전력 인프라 프로젝트의 착공과 설비 투자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둘째, 기존 전력망 확충과 재생에너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AI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 투자를 확대해 가고 있다. 스리마일섬 원전3 기반 전력 확보 전략을 추진하는 마이크로소프트나 듀안 아놀드 원전 재가동 프로젝트와 연계한 구글의 사례처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상시 전력을 제공할 수 있는 원전과 SMR을 핵심 기저 전원으로 검토하고 있는 이유이다.
셋째, 전력 확보 규모 자체보다 제한된 전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침지냉각4등 AI 기반 에너지관리 시스템을 확대 적용하는 것처럼, 전력 가격 변동성과 공급 불안정 상황에서도 연산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완충 능력(Buffer)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 효율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넷째, 단일 연료나 단일 전력망 의존이 불러올 외부 충격에 취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너지 조달 구조 자체를 다변화하고 있다. 셰브론이 텍사스에서 가스발전·장기 PPA·ESS를 결합한 전력 생태계 구축에 나서는 것처럼, 여러 전력원을 조합함으로써 공급 안정성과 가격 변동 대응력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복합형 전력 포트폴리오 구축에 나서고 있다.

  • 3.스리마일섬 원전 (Three Mile Island):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 빅테크 기업들이 장기 PPA 형태로 전력 확보를 검토 중이며, AI 시대 기저 전원 확보를 위한 대표 원전 사례
  • 4.침지냉각 (Immersion Cooling): 서버를 액체(절연 냉각유)에 ‘담가서’ 열을 제거하는 냉각 방식다른

“에너지 조달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입 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장기간 안정적으로 가동 가능한 발전원을 직접 확보하는 방향으로 조달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

우리 기업의 기회와 과제

전력 수급 불안은 국내 기업에게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성장 기회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미 잡은 곳과 아직 대응 전략조차 설계하지 못한 산업 간 격차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첫째, 전력기기 산업은 글로벌 공급 부족 환경 속에서 슈퍼 사이클을 맞았다. AI 데이터센터 증가로 변압기, 차단기 등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늘고 있으나, 설계·시험·인증 과정과 특수 운송 문제 등으로 인해 글로벌 공급은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대형 전력 변압기의 글로벌 리드타임은 최대 210주(약 4년)에 달하는 상황이다. 가격 경쟁력과 납기 대응력을 확보한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등은 북미와 중동을 중심으로 글로벌 수출 기회를 확대하며 수혜를 받고 있다.
둘째, 원전 및 SMR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한국 원전 산업의 경쟁력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IEA가 차세대 원전 수요 확대를 전망하는 가운데, 40년 이상 축적된 경험과 수행 역량을 보유한 한국은 최근 체코 원전 사업 수주 등을 통해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다시 입증했다. 이는 원전과 SMR이 전략 전원으로 재조명되는 흐름 속에서 한국수력원자력, 두산에너빌리티 등 국내 원전 생태계 전반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반도체·철강·석유화학 등 전력 다소비 제조업체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전력 비용은 오르는데 자가발전 설비를 갖추기엔 규모·입지 제약이 크고, 재생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면 비용 부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대응이 늦어지면 ESG 규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PPA·재생에너지·ESS·원전·SMR 등을 조합한 조달 구조를 구축하고, 생산 거점과 전력 확보 전략을 동시에 설계하는 전력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제한된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가 결국 장기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전력 확보가 경영 전략의 중심이 되는 시대

호르무즈 봉쇄 리스크 확대와 AI 전력 수요 급증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지만, 기업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돌릴 전력을, 내일도 확보할 수 있는가?’ OECD는 호르무즈 봉쇄로 한국의 2026년 경제성장률이 주요국 중 가장 크게 후퇴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국내 산업의 에너지·전력 수입 의존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 주는 신호이다. 이제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구매 부서의 비용 관리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생산 전략, 투자 전략, 데이터센터 전략, 공급망 전략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경영 변수로 격상되고 있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의 대응 방향은 분명하다. 장기 PPA를 통해 전력 조달 안정성을 확보하고, 원전·SMR로 상시 기저 전원을 강화하며, 냉각·전력 효율 혁신으로 동일한 전력에서 더 높은 AI 연산 성능을 확보하고 있다. 동시에 재생에너지·ESS·가스발전·원전 등을 결합한 복합 포트폴리오 구축으로 외부 충격에 대응하고 있다. 핵심은 리스크 제거가 아니라, 다양한 전원의 조합을 통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력과 생산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안정적인 전력을 장기간 확보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업이 새로운 경쟁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전력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