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경제·경영 환경 전망
변화하는 통상 패러다임 속
한국의 기회와 전략
이호석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 소장
글로벌 통상 환경이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선 2026년 국제 통상 질서 속 각국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KERI 포럼 메인 세션에서 미국 중심 통상질서 변화 속에서 유럽과 중국이 취해온 대응 전략과 한국이 얻어야 할 교훈을 중심으로 논의했다면, 세션 직후 진행된 본 인터뷰에서 이호석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 소장은 미·중 구조 재편 속 한국 기업의 리스크와 기회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글 김나연
사진 신규철, 김동열
Q.오늘 포럼 메인 세션에서는 미국 중심의 새로운 통상 질서와, 이에 대응하는 EU·중국의 전략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국제통상 전문가로서 현재 국제 정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를 상대로 단순히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기존의 규칙 기반 시스템(rules-based system)을 파괴해서라도 미국의 지속 불가능한 거시경제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조치입니다. 한편 미국이 중국을 러시아처럼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활용해, 자국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할 대체 시장을 찾고 있습니다. 요컨대, 기존의 '규칙 기반 질서'는 사라지고 강력한 ‘경제 민족주의’에 기반한 강압적 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무역 질서 속에서 유럽과 한국은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EU 일각에서는 강경한 보복 조치를 주장하거나,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과의 상호 FTA를 제안하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역효과를 낳아 미국이 NATO를 탈퇴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EU와의 FTA가 미국의 무역 수지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럽은 미국의 관세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대신, 미국에 대한 투자 확대와 국방비 증액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미국산 무기 구매를 늘리겠다는 암묵적인 합의이기도 합니다. 다만 미국 시장의 수익성과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고려하면, EU는 장기적으로 어차피 이 두 가지를 모두 추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럽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현실에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입니다. 미국 시장이 개방되지 않는다면 EU 수출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큰 시장은 사실상 중국 하나뿐이며, 다른 국가들 역시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럽의 자동차 및 고부가가치 산업의 경우 설계는 서구에서, 생산은 중국에서 이뤄지는 이른바 ‘애플식 아웃소싱 모델’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으며, EU 회원국들은 전기차와 배터리 기술 분야에서 중국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기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기존 질서의 변화는 유럽의 쇠퇴를 가속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EU로서는 안보와 지속가능성 규정을 무기 삼아 수입 장벽을 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는 제한된 지정학적 영향력을 보완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물론 중국 역시 EU의 약화를 감지하고 G7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유럽의 과잉 생산과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수출 통제·투자·시장 접근에서의 상호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Q.EU의 대응 방향에 대해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회를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국 기업이 마주하는 현실부터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현재의 변화는 단순히 트럼프 당선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경제적 패권의 균형이 무너지며 나타난 불가역적인 변화입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과 비교하면 한국의 기회는 감소할 전망입니다. 미국, 인도, 유럽 시장에서 중국산 수출품을 대체하며 얻었던 '무역 전환 효과'는 이미 각국의 강력한 규제 시스템으로 보호받는 현지 대기업들로 발생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글로벌 성장의 절반 가까이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시장에서 나옵니다. 이제는 수출이 아닌 현지 직접 투자가 불가피한 시대입니다.
한국의 통상 정책 역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현재 많은 국가가 제3국과의 교역 관계를 ‘합법화’하기 위해 양자 FTA 체결을 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국가 안보 예외 조항을 근거로 새로운 무역 장벽이 세워지고 있으며, 이는 FTA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러한 협상의 상당수는 보여주기식에 가까우며, 이에 과도한 비용을 투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Q.EU 역시 ‘안보’를 이유로 장벽을 높이는 모습입니다. 그 과정에서 ‘디리스킹(De-risking)’과 ‘툴박스(Toolbox)’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디리스킹(De-risking)은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디커플링(Decoupling)과는 다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만을 선별적으로 줄이겠다는 접근입니다. 완전한 단절은 비용이 지나치게 크고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디리스킹은 지금까지 해오던 정책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디리스킹과 전략적 자율성은 EU 경제 안보 원칙의 핵심 기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EU는 원칙적으로 안보를 직접 다루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 사안에 특히 민감하지만, 그럼에도 회원국들은 외국인 투자 심사와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또한 공동 위험 평가와 가이드라인으로 구성된 ‘툴박스’를 구축해 5G 네트워크와 전기차를 포함한 ICT 공급망 전반에서 외국 기업 참여로 인한 리스크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분야 역시 미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규제 개편이 진행 중입니다. 디지털서비스법(Digital Services Act, DSA),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 DMA), AI법(AI Act) 은 모두 이러한 목적 아래 제정된 법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규제들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사용할 보복적 압박 수단의 성격도 띠고 있으며, 동시에 EU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Q.중국의 과잉 공급과 그에 대한 미국과 EU의 대응이 한국 기업에 어떤 위험과 기회를 만들어낸다고 보십니까?
중국의 과잉 생산은 철강과 자동차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중국은 단 15년 만에 이 분야의 글로벌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구조적으로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단순히 중국과의 거래를 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곡된 글로벌 가격이 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내 가격을 국제 시장과 분리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관세나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할당관세 등이 모두 이를 위한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제3국은 두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국영 기업들이 쏟아내는 저가 공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 유럽의 수입 관세 및 규제 준수 비용 상승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부수적인 피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 기회도 있습니다. 유럽에서 화웨이의 점유율을 반토막 낸 5G 제한 조치는 한국 기업들이 해당 시장에 진입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EU의 반보조금 관세는 한국 기업들이 중저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Q.철강산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에 이어 EU도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요. 한국은 EU와 FTA를 체결했는데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솔직히 말해 한국이나 다른 FTA 체결국에도 예외는 없을 것입니다. 특정 국가를 법률에 명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미국과 달리, EU 조약 체계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왜 EU가 단순 관세가 아닌 쿼터(할당제) 제한으로 선회하느냐는 것입니다. 중국 국영기업들은 이윤보다 생산량이나 고용 유지를 우선시하며, 필요하다면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판매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관세가 억제 수단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반론도 타당합니다. 한국을 비롯한 FTA 체결국들은 이미 시장 접근권을 위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만약 EU가 쿼터 없는 우대 조치를 상실한 한국에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현재 협상 중인 메르코수르(Mercosur), 인도, 인도네시아 등 주요 FTA파트너 국가들에게 EU와의 FTA체결에 대한 신뢰성과 기대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 캐나다, 뉴질랜드, 칠레, 베트남 등 유사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과 연대해 협상을 조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 연합을 상대로는 EU 역시 일방적으로 담론을 주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Q.데이터나 클라우드 같은 신산업 분야도 규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규제 강화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머지않아 통신·네트워크 규제 패키지는 여러 정치적 목표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습니다. 우선, 기술적으로 수렴하고 있음에도 서로 다르게 규제받던 클라우드와 전통 통신망 사이의 형평성(level playing field)을 맞추려 할 것입니다.
또한, 사이버보안법(Cybersecurity Act) 개정을 통해 데이터 주권 요건을 강화하고 유럽산 클라우드 서비스 및 하드웨어 사용을 독려할 것입니다. 개별 국가의 규제 기관 대신 EU 중앙의 권한을 강화해 유럽 전역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 할 것입니다.
정부의 역할 변화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민간 기업인 노키아(Nokia)는 해저 케이블 사업부를 프랑스 정부에 매각했는데, 프랑스는 러시아나 중국 군함의 위협에 대응해 해저 케이블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핵무장 해군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의 국적과 해당 정부의 억지력(deterrence)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Q.마지막으로 2026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정재계 리더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경제 안보의 시대에는 정부와 기업이 따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과 불확실성을 초래합니다. 이제 정부가 이러한 리스크를 얼마나 잘 완화하고 보증해주느냐가 기업의 투자 결정을 좌우합니다.
기업과 정부는 R&D나 금융뿐만 아니라 연대 구축, 공급망 보안, 정보 수집 등 비전통적 영역에서도 공동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민첩한 경제 외교(economic statecraft)'가 필수적인 국가에서는 한국경제인협회(FKI)와 같은 협의 기구가 수평적 소통과 조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