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 합의
통상 질서의 뉴 노멀,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은 시작에 불과
글 최병일 법무법인 태평양 통상전략혁신 허브 원장

Profile
-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통상전략혁신허브 원장(2025~)
-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2024~)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2011~2014)
- APEC Telecom Working Group, Business Facilitation Steering Group Chair(1996~1997)
- WTO 기본통신협상 한국협상단 수석대표(1994~1997)
협상 타결 뒤의 그림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설정한 8월 1일 시한을 코앞에 두고 한국은 극적으로 관세 협상을 타결 지으며 상호관세 15%, 자동차 관세 15%를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반도체, 의약품 관세도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확보했다. 7월 중순 일본과 EU가 연이어 관세 협상을 타결하면서 시한에 몰린 한국으로서는 급한 불은 끈 셈이지만, 2012년부터 13년간 누려 왔던 한미 FTA ‘무관세’는 사라졌다. 협상 타결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패키지(미국 조선 산업 재건을 위한 1,500억 달러 규모의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MASGA) 프로젝트를 포함), 1,000억 달러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다.
끝난 줄 알았던 협상은 타결 발표 직후부터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한국과 미국은 무엇이 합의됐는지에 대한 서로 해석을 내어놓았다. 대미 투자 패키지의 성격과 운용 방식, 농산물 개방, 디지털 분야 비관세장벽에 대한 서울과 워싱턴의 말은 달랐다. 8월 25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은 이견을 해소할 기회였지만, 공동합의문은 발표되지 않았다. 한국은 합의했다는 15%가 아닌 25% 자동차 수출 관세를 여전히 지불하고 있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과 주요국들의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산업 정책 보편화의 이중주가 만들어 내는 보호주의 광풍은 제조업 통상대국으로 경제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초고속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경제의 역동성마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은 내우외환의 이중고다. 살아남지 못하면 한국은 ‘한때 선진국’이었던 국가로 자리매김할 운명이다. 위기 속 기회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새로운 국제 무역 지형도
한국이 미국과 관세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 만들어 내는 국제 통상 지형도가 더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국가별 맞춤형 관세인 상호관세를 선언한 이후, 100일 동안 협상이 진행됐고 8월 7일 미국은 국가별 상호관세를 확정·발효했다. 영국 포함 3개국은 10%, 한국·EU·일본 포함 20개 국가는 15%, 그리고 중국·인도를 포함한 46개 국가는 15%를 초과하는 상호관세를 부담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기 전 2024년까지 WTO 회원국에는 수출 국가의 국적을 차별하지 않는 최혜국대우(MFN) 관세1를 부과해 오던 미국은 이제 국가마다 다른 관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발 관세 융단폭격은 80년 가까이 유지돼 온 규범에 기반한 다자무역 체제를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FTA를 무력화했다. 트럼프발 관세장벽에 주요국들도 무역 장벽을 쌓고 산업 정책으로 대응하면서 국제 통상 질서는 힘에 근거한 관리무역 체제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다. 한국이 MASGA를 포함한 대규모 투자 패키지를 앞세워 관세 협상을 타결한 것은 한국이 트럼프 대통령이 설계하는 ‘힘에 의존하는 통상 질서’에 일본, EU 등 주요 국가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동참했음을 의미한다. 21세기 패권 경쟁의 최후의 승부처가 될 군사 경쟁의 판도를 좌우할 해군력에서 중국의 급속한 추격에 쫓기는 미국에 한국의 MASGA 제안은 한국 신정부의 국익 중심 실용 외교가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더욱 강화하는 토대 위에 있음을 보여 준다. 지정학적 충돌과 경제안보의 시대에 관세는 경제통상을 뛰어넘어 산업기술 협력 문제이며 외교안보 문제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업의 부활에 강한 의지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은 국익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 1.통상이나 항해 조약 등에서 한 나라가 특정국과 조약을 신규로 체결 또는 갱신하면서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 부여한 대우 중 최고의 대우를 그 나라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각국이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장벽을 높이던 시대에 양국 간 무역 협상에서 장벽을 없애는 방법으로 적용되던 기준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무역 장벽을 없애기 위한 목적을 갖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나 그 뒤를 이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정착되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나라에 공통으로 적용되고 있다.(출처: 기획재정부)
끝나지 않은 관세 전쟁
트럼프의 관세는 미래진행형이다. 7월 말 관세 협상 타결 후에도 반도체, 의약품, 철강, 알루미늄 파생 제품 관세가 연이어 발표됐다. 가구에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다. 철강과 알루미늄에 부과했던 25% 관세가 50%로 상향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트럼프의 관세는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인상될 수 있다. 트럼프의 속내는 “관세가 싫으면 미국에 투자하라”는 겁박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이번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한국 대기업들은 대미 투자 1,500억 달러를 약속했다. 기업들은 관세 그 자체도 싫어하지만 관세 수준과 시기의 불확실성은 더 싫어한다. 경쟁국 기업보다 유리한 가격 경쟁력을 보장했던 한미 FTA 프리미엄도 사라지고, 트럼프의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장벽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기존의 무역과 투자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나에게 미국 시장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인가?”다. 오랫동안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던 중국의 매력도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미국이 한국 수출의 19%를 감당하며 세계 최대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거대 규모의 EU 시장은 비회원국인 한국에는 비관세장벽으로 쌓은 성채와 같다. 동남아 시장 등 글로벌 사우스의 잠재력은 커지지만 미국 시장에서 밀려나는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각오해야 한다. 자명한 결론은 지금 당장 미국 시장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수출 혹은 투자로 좁혀진다. 수출은 고관세장벽을 돌파해야 하고, 투자는 붕괴된 미국의 제조업 생태계 속에 혈투를 벌여야 하는 일이다. 트럼프가 평균 2.5% 관세를 15% 관세로 무려 6배가 높아진 수입장벽을 쌓으면서 경쟁의 형태는 복잡해졌다. 미국 국내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별안간 수직 상승한 것이다. 한국은 일본, 독일 등 기존의 경쟁 상대 이외 이제 미국까지 상대해야 한다.
단기 대책과 중장기 대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당장은 높아진 관세 부담을 소비자 가격으로 이전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트럼프의 관세 폭풍이 잠깐 불다가 그치는 바람이 아니라 정체된 구름 전선이라면 혁신을 통한 원가 절감과 브랜드의 충성도를 높이는 길밖에 없다. 동시에 미국 이외 다른 시장을 발굴하고 개척해야 한다. 기업들의 혁신과 발굴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는 제도적 지원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의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장벽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기존의 무역과 투자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나에게 미국 시장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인가?”다.”

보호주의 역풍 속 한국의 길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기업들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진행 중인 국가들의 동향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조건으로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 짓는지 파악해야 한다. 특히 처음부터 트럼프 행정부와 보복 관세로 맞대응하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의 경우 협상 추이를 정밀 모니터링해야 한다. 중국의 핵심 광물 무기화, 우회 수출로 확보 전략에 맞서 미국의 환적 금지, 수출 통제 등은 한국 기업들의 무역과 투자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더 넓은 세계 시장을 질주해야 하는 한국은 보호주의 역풍 속에서도 경제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다. TPP 협상을 주도했던 미국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탈퇴해 CPTPP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인 CPTPP를 무역 대국 한국은 이제 외면할 수 없다. 영국이 가입했고 EU마저 가입 의사를 표명하면서 CPTPP의 경제 영토는 획기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농수산물의 추가 개방 부담을 이유로 과거처럼 주저한다면 트럼프가 주도하는 통상의 뉴 노멀(New Normal) 시대에 한국호는 표류당할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