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국가의 성패를 읽는 시선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

국가의 성패를 읽는 시선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

제임스 로빈슨 이미지

세계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를 성장의 길로 이끌었고 한국은 그 혜택을 극적으로 증명한 대표적 국가다. 그러나 미국 내부의 불평등과 정치적 균열이 세계화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며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협력의 향방과 한국의 도전 과제,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교수를 만났다.

김혜원

사진 신규철

글로벌 통상 환경과 세계화

Q. 작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신 뒤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전하며, 최근 새롭게 등장한 글로벌 경제 패러다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A. 과거의 훌륭한 규범 기반 질서가 최근 9개월 사이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규범 기반 질서의 배경에는 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투쟁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도 존재했죠.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기보다는 기존의 긴장이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거나 극적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Q. 경제학적 관점에서 세계화는 어떻습니까?

A. 세계화와 경제 발전의 연계는 실로 놀랍습니다. 1913년을 기준으로 한 세계 실질 수출액 추이를 보면 1960년대 이후, 특히 1980년대부터 이루어진 폭발적인 세계화가 글로벌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화, 국제 교류, 수출 확대가 실제로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사실은 다양한 연구와 사례에서 확인됩니다. 세계은행이 1993년 발표한 「동아시아의 기적」(The East Asian miracle)이라는 보고서처럼 말이죠.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 싱가포르, 홍콩, 대만, 그리고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모두 세계 경제와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특히 한국은 동아시아의 기적을 대표하는 사례로, 국제 교류를 확대하며 국민 소득이 높아진 세계화의 순기능을 보여 줍니다.

미국 사회의 분열과 민주적 반발

Q.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세계화의 혜택을 입었지만 미국 시민 상당수는 급격한 세계화의 시기에 실질적인 혜택을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고교를 중퇴한 집단의 실질 임금은 지난 50년 동안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탈산업화, 노동 시장의 구조 변화, 기술 변화 등이죠. 대개 세계화는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미국 내 불평등을 확대한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계화의 이익이 사회 전반에 고르게 분배되지 못했고, 그러한 불만이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Q. 미국 사회를 분열시킨 요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 오늘날 미국 정치의 주요한 갈등 원인은 교육에 따른 격차입니다. 1986년 이후 대학 교육이 대중화되며 형성된 고학력 엘리트 집단은 분명한 정책적 선호도, 가치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는 동성혼을 포함한 사회적 자유주의를 지지했습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확신도 공유했죠.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능력주의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사회적 결속을 위협합니다. 이는 엘리트와 비엘리트 계층의 간극을 키우며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규제와 사회공학에 대한 엘리트의 신념입니다. 뉴딜 시기에 규제가 많은 성과를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규제가 더 많은 성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사회공학적 설계를 밀어붙였습니다.
이민 문제 역시 갈등을 키웠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미국 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양 진영의 분열을 심화하는 감정적 쟁점이 됐죠. 저는 이러한 현상이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누적된 가치관이 충돌해 발생한 민주적 반발(backlash)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

Q. 1970~1980년대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에 놓여 있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포용적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한국이 거둔 경제적 성공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A. 한국의 사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성취와 민주주의적 전환의 연속성을 종합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초기 성장이 권위주의 정권에서 이뤄진 것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성장에 몰두하며 수출 중심으로 전환을 꾀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덕분에 삼성과 현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죠. 문제는 지속가능성입니다. 독재 체제가 이어졌다면 과연 한국은 경제 성장을 지속했을까요? 한국의 특허 건수는 1990년대에 이르러 급증했는데, 이는 민주화를 달성한 1987년 이후 창의성이 본격적으로 발현됐음을 증명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성과는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1970년대의 성취가 지속된 데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주요하게 작용했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잠재력이 비로소 꽃필 수 있었습니다.

자유무역과 글로벌 질서의 미래

Q. 자유무역과 글로벌 질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A.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이점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지난 50년간 유지된 전통적 세계 질서가 미국의 정치경제와 양립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세계화의 전성기를 뒷받침했던 정치적 연합이 미국에서 다시 등장할 가능성 또한 낮아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계층을 정책적으로 보상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의 정치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효과가 있을 법한 정책 수단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미국 없이 세계화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균형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둘째는 미국의 정치경제와 양립 가능한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이 시스템 안에서 역할을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답을 알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미국 없이도 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른 방식으로 미국을 관여시킬 수 있을까?’ 지금이 바로 ‘리부팅’(rebooting)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미국 없이도 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른 방식으로 미국을 관여시킬 수 있을까?’
지금이 바로 ‘리부팅’의 순간입니다.”

아·태 협력과 한국의 역할

Q. 미국 없이 세계화를 재건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아·태 지역에 어떤 기회와 위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또 APEC과 PECC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 미국을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껏 무역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렸고, 앞으로도 APEC 회원국을 비롯한 나라들을 필요로 할 텐데요. 이들 국가가 미국 없이 무역을 추진하는 것이 거꾸로 자신의 필요성을 미국에 증명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현 상황을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세계화에 대해 자각하도록 하는 전략이죠.
여기에서 APEC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모든 나라는 제각기 이해관계를 가지고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가 공동의 이익을 저해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APEC은 국가들이 개별 이익을 좇아 행동할 때 발생하게 될 비용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국가 간 현안을 조율해 더 나은 합의점을 도출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Nobel Prize Outreach 사진: 나나카 아다치(Nanaka Adachi)
2024년 12월 10일(현지 시간)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경제학상 메달과 증서를 받는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

Q. 한국과 같은 중견국이 규범 기반의 개방적인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A. 아시다시피 한국은 원조 수혜국에서 글로벌 혁신 선도국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습니다. 기술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휴대폰, 자동차, 반도체 등에서 성과를 보이는 데다 문화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K-Pop과 K-뷰티에서도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죠. 이는 포용적 제도가 혁신과 번영으로 이어진 모범 사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같은 본보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국이 지닌 창의성 자체가 변화이자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Q. 최근 변화하는 글로벌 질서가 한국에 제시하는 도전 과제는 무엇일까요?

A.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극단적인 평화 상태가 유지됐습니다. 냉전의 시기이자 번영의 시간이었죠. 전 세계가 UN, 세계은행, IMF 등의 국제기구를 설립하며 협업한 결과입니다.
과거를 교훈 삼아 주어진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급격한 기술 발전, 기후변화 등이 모두 도전 과제입니다. 많은 이가 최근 6개월간 미국의 경제 정책 변화에 골몰하지만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정부의 기조는 변할 수 있지만 전 세계가 힘을 합쳐 대대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기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요. 단일 국가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는 국제 협력을 통해 풀어 나가야 합니다. APEC과 같은 국제기구가 중요한 이유죠.

도쿠라 마사카즈 이미지
한국 기업의 AI 도전 과제

Q. 미·중 갈등, 무역 분쟁, 기술 패권 경쟁 등 지정학적 갈등과 경제 질서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지하거나 개발해야 하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해 왔지만 근래 AI 경쟁에서는 다소 뒤처졌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는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짐작하건대 투자 기반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AI를 혁신하는 데는 대규모 자본과 투자가 필요하며, 여기서 자본은 인적 자본과 데이터센터 등의 물적 자본을 포함합니다. 미국의 경우 든든한 금융 시장이 AI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자동차 시장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국가별 맞춤형 모델을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혁신적인 성공을 달성했습니다. 이처럼 독자적인 한국형 AI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AI 산업에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겠죠. 한국의 조선업이 해외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도약했듯이 과감한 투자와 협력, 한국 사회의 강점인 창의와 혁신을 토대로 한국형 모델이 AI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기를 기대합니다.

Q. AI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즘, 한국 기업 역시 강점을 살리거나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능성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현재 중국은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AI를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실생활에 폭넓게 적용 가능한 모델을 택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은 범용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 아직 AI가 일상생활에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방식으로 AI를 발전시키는 것처럼 한국도 무엇을 차별화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나라와는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Q. 앞서 한국 기업이 글로벌 AI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적응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요. 한국은 현재 고령화와 저출산 위기를 겪으며 대대적인 인구구조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변화가 노동 시장과 성장 잠재력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A. 동아시아 지역은 대체로 인구 감소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UN의 2100년 인구 전망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인구의 절반 수준으로, 일본은 1억 2,400만 명에서 7,700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인구구조 변화는 연금과 국가 부채 등 지속가능성에 큰 부담을 주고, 특히 가족 부양이라는 강력한 사회 규범이 존재하는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어려움이 배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 시장과 관련한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첫째는 로봇과 AI의 접목입니다.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불충분한 국가에서 로봇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어쩌면 경제를 지속 가능하게 하고 부를 창출하는 기반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은 앞으로 부족한 인력을 기술과 로봇으로 대체하게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다만 로봇의 소유권자에 따라 분배적 결과가 달라질 것이므로 세심한 정책적 고려가 요구됩니다. 둘째는 외국인 노동자의 도입입니다. 1970년 아랍에미리트는 자원이 풍부했던 반면 인력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법을 찾아 외국에서 근로자를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이를 참고해 생산성 향상에 대한 해법을 고려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한국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

Q.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A. 한국 사회는 특별한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왔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가 부채를 갚고 IMF 체제에서 조기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이후 성장과 혁신을 빠르게 거듭하며 경제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성공도 이뤄 냈습니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여러 도전 과제에 직면하겠지만 특유의 역량과 회복력으로 멋지게 도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