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를 걸으며
연주회장의 침묵,
공공 음악회장의 정체성 변화
클래식 음악회에서 웅장한 1악장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감탄의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예상치 못한 침묵 속에 민망했던 경험. 연주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어두운 객석에서 눈을 찌푸려 프로그램 노트의 글자를 더듬던 경험.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클래식 음악회의 규범(어두운 객석, 연주 중 대화 금지, 박수 타이밍 제한 등)은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글 안정순 음악평론가
누구나 입장료를 내면 참여할 수 있는 음악회의 등장
중세 시대에는 종교 음악이 중심이었으며, 대성당과 수도원이 음악 연주의 주요 공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음악 연주의 중심지는 유럽 각국의 왕실과 귀족들이 전속 음악가를 둔 궁정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공공 음악회장이 등장해 교회와 귀족 중심의 음악회가 점차 중산층을 위한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72년 런던에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존 배니스터(John Banister, 1630~1679)가 자신의 집에서 개최한 음악회는 기록상 최초의 유료 공공 음악회로 알려져 있다. 입장료는 1실링(shilling)으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에 해당했다. 이후 파리에서는 작곡가이자 오보 연주자인 안 다니캉 필리도르(Anne Danican Philidor, 1681~1728)가 1725년 ‘콩세르 스피리튀엘’(Concert Spirituel)이라는 연주회를 창설했고, 당시 연주회 입장료는 1인당 30솔(sols)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고가였다. 18세기 말엽에는 공공 음악회 문화가 독일어권 국가들로 확산됐으며, 라이프치히에서는 부유한 직물 상인들이 유능한 연주자를 초청해 소규모 공연을 열었다. 이들은 1781년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연주홀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때 창립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사교의 장이었던 18세기 공공 음악회장
18세기의 음악회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자리만이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행사였다. 청중은 관심 있는 음악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거나 주변을 거닐며 교류했다. 오페라 극장이나 살롱 음악회에서는 음식과 음료를 즐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음악 감상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으며 오락과 사교의 요소가 강했다. 또한 연주자와 청중이 가까운 거리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며, 공연 도중 즉흥 연주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1781년 콩세르 스피리튀엘 포스터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한 공연에서 교향곡, 협주곡, 아리아, 오라토리오 등 다양한 장르가 혼합 연주됐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대한민국 대표 장수 프로그램인 KBS <열린음악회>처럼 클래식, 국악, 대중가요, 뮤지컬 등 여러 장르가 한데 어우러지는 현대의 대중 음악회와도 유사하다. 한편 연주자의 이름은 연주곡마다 적혀 있는데 작곡가는 한 사람, 레몽 씨(M. Raymond)의 연주곡에만 적혀 있다. 작곡가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당시에는 연주자가 중요한 예술적 주체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19세기 공공 음악회장, 예술적 숭고함의 장으로 변모하다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자 철도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중산층 청중이 음악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됐고, 대규모 관현악 작품이 많아지면서 여기에 적합한 더 넓은 공연장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1781, 1884 재건), 빈 음악협회 황금홀(Musikverein, 1870),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 1882), 런던 세인트 제임스 홀(St. James’s Hall, 1858) 등 유럽 주요 콘서트홀이 건립됐다.
이 시기부터 객석의 구분이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했으며, 귀족과 부르주아는 특정 좌석을 차지하고, 서민 계층은 저렴한 입석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또한 연주 중 대화가 금지되고 이동이 제한되는 등 점점 엄격한 감상 태도가 요구됐다. 청중은 음악에 집중하며 조용히 감상해야 했고, 한 악장이 끝나도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됐다. 즉 연주회장에서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는 관객의 모습은 19세기의 산물인 것이다.
연주 프로그램의 구성 방식도 변화했다. 즉흥 연주는 점점 사라지고, 연주회는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기획됐으며, 작곡가의 악보를 충실히 연주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제 공연의 주체였던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구현하는 ‘해석자’로 인식됐다. 이와 함께 음악회는 사교적 모임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 의식과 같은 숭고한 예술 경험으로 변화했다. 예컨대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연주 중 박수를 금지하고 음악을 경건하게 감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서 장대한 교향곡과 관현악 작품이 연주되는 엄숙한 분위기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는 낭만주의 미학, 음악의 신성화, 대형 오케스트라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19세기 이후 음악은 단순한 오락에서 ‘예술적 감상의 대상’으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공공 음악회장 역시 ‘사교의 장’에서 ‘예술적 체험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됐다.
오늘날의 음악 감상과 공공 음악회장의 의미 변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라인 스트리밍, 유료 공연 중계, 가상 현실(VR) 콘서트가 확산됐다. 이로 인해 공공 음악회장의 물리적 공간은 축소됐지만 음악 감상의 접근성과 개인화된 경험은 더욱 강화됐다. 19세기 산물인 엄숙한 공연 관람 방식이 변화하고 있으며 일부 연주회장은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의 공연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관객이 연주 중 이동하거나 음식을 즐기는 콘서트, 해설이 곁들여진 공연, 사전 질문을 반영한 즉흥 연주 같은 참여형 공연 등이 증가하는 식이다. 이는 18세기 공공 음악회의 사교적 성격과도 연결되며, 음악회장의 역할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시 ‘소통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