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배너

in Story & News

모든 국제 산업쇼와 비엔날레의 뿌리,
1851년 런던 세계 박람회

세계 최대 IT 및 가전 전시회 ‘CES’,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제 ‘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 국내 최대 모터쇼 ‘서울 모빌리티쇼’…. 기술과 예술, 국가와 산업이 어우러진 복합적 국제 전시는 이제 단순한 박람회를 넘어 현대적 시선의 축제로 기능한다. 이들은 사실 모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바로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시작된 ‘세계 박람회’다.

문소영 작가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사진

카미유 피사로, <수정궁>(The Crystal Palace), 1871.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가 제시한 복합적인 전시 형태는 훗날 미술 비엔날레 같은 문화 전시와 산업 박람회의 형식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야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실용과 미학을 갖춘 근대성의 성전, 수정궁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는 기술과 예술, 산업과 생활 양식, 국가의 자부심이 한자리에 모인 최초의 국제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가 제시한 복합적인 전시 형태는 훗날 미술 비엔날레 같은 문화 전시와 산업 박람회의 형식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야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런던 세계 박람회는 하나의 건축물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은 ‘수정궁’(Crystal Palace)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수정궁은 런던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거대한 유리 철골 건축물이었다. 철과 유리만으로 구성된 조립식 구조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공법이었고, 나무 한 그루도 베지 않고 숲을 감싸 안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동서로 564미터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프랑스의 장대한 왕궁 베르사유 궁전보다 길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근대성의 성전’이었다.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은 온실을 만들던 기술을 응용해 이 장대한 건축을 불과 16주 만에 완공했다. 독일 건축사학자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저서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Pioneers of modern design)에서 이렇게 밝혔다. “팩스턴의 이 작품이 19세기 중반에 철과 유리로 만든 건축물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까닭은 어마어마한 크기와 함께 다른 재료를 쓰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7미터짜리 격자를 기본 단위로 삼아 전체를 구성한 조립식 구조의 독창성 때문이다. 이런 조립식 구조가 아니었다면 수정궁처럼 거대한 건물을 불과 16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세우는 기적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정궁은 박람회가 끝난 후 런던 남부 교외의 시드넘으로 옮겨졌지만 그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왔던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가 카미유 피사로가 건축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림에 담았을 정도였다. 그는 수정궁 전경과 함께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담아 당시의 모던 라이프를 표현했다.

국제 박람회의 탄생과 확산

1851년 런던 박람회의 정식 명칭은 ‘만국의 산업 대전시회’(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였다. 산업혁명의 중심국이었던 영국은 자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동시에 외국의 산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대규모 국제 전시를 기획했다. 중심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 있었고, 그는 이 전시회를 국가적인 사업이자 문명적 사명으로 여겼다. 수정궁 내부에는 방직 기계, 도자기, 철도 모형, 가구, 조각, 회화, 민속품 등 전 세계에서 모여든 1만 4,000여 개의 전시품이 배치됐다. 진귀한 전시품을 한데서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붐볐다. 결국 ‘박람회장’이라는 공간은 인간과 사물, 국가와 기술이 교차하는 무대로 자리매김했다.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미지가 있다. 런던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한 폭의 그림에는 거대한 유리 천장을 통해 햇빛이 쏟아지는 전시장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었던 분수대 주변을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과 실크 모자를 쓴 신사들, 아이들이 거니는 풍경이 도심의 거리 같다. 가로수처럼 위치한 거대한 나무는 하이드파크에 원래 있던 나무를 보존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출판사와 석판화 공방이 박람회를 기념해 협업 제작한 석판화 세트 중 한 장이다. 170년 전 이미 ‘엑스포 굿즈’가 존재했던 셈이다.
1851년 런던 박람회의 여파는 엄청났다. 무려 640만 명의 관람객이 박람회를 찾았고 다른 서구 열강도 경쟁하듯이 앞다투어 국제박람회를 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런던 박람회 4년 후인 1855년에 파리 세계 박람회를 개최한 데 이어 1867년에 박람회를 한 번 더 개최했다. 이에 질세라 영국도 1862년에 런던 세계 박람회를 개최했다.
187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빈에서 세계 박람회를, 1876년에는 미국이 필라델피아 박람회를 개최하며 국제 박람회 열풍에 합류했다.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도입된 파빌리온(Pavilion)1 방식에 따라 참가국들은 자국의 전통을 드러내는 전시관을 건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는 무려 167개의 파빌리온이 건설되기도 했다. 1899년 파리 세계 박람회는 파리 박람회 개최를 기념해 세워진 에펠탑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조선 말기였던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를 통해 국제 박람회에 최초로 진출했다. 이후에도 한국은 여러 국제 박람회에서 한국의 전통을 선보였는데,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서 당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1900년 4월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 직후 보도한 한국관 관련 기사 원문과 소개 삽화가 나란히 실린 것이다.

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사진

조지프 내시, <1851년 런던 박람회>(The Great Industrial Exhibition of 1851), 1851. 영국박물관 소장

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사진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한국관 전시를 소개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의 삽화

박람회가 바꾼 전시의 풍경

1851년 런던 세계 박람회는 산업 발명과 기술 진보만을 과시한 것이 아니었다. 이 박람회를 계기로 예술과 디자인, 공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했다. 무엇보다도 예술과 산업, 전통미와 기계가 충돌하며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됐다. 특히 미술가 윌리엄 모리스와 사회학자 존 러스킨 등은 이 박람회를 통해 기계화에 따른 예술의 몰개성화를 비판하면서 수공예와 예술의 통합을 모색하는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이끌었다. 이들은 인간의 손을 거친 수공예의 아름다움과 노동의 윤리를 강조하며 예술의 탈산업화를 추구했다. 그들의 사상은 훗날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 운동에도 영향을 주며 예술과 디자인을 통합하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박람회는 예술이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 계몽의 수단이자 공공의 자산임을 보여 주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시가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플랫폼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러한 전시 형식은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가관, 현대 미술관의 큐레이션 시스템, 그리고 산업과 감성을 접목한 CES 같은 전시로 이어졌다.
이처럼 세계 박람회는 오늘날 시각 문화의 구조를 형성하고, 발명과 혁신의 의욕을 고취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여러 순기능으로 현대에도 계속 힘을 발휘하고 있다.